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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연주가 비교

나이젤 케네디 VS 쥘 아팝


 세상에는 다양한 타입의 연주자들이 존재한다. 우선 깊이 있고 숭고하면서도 사색적인 색깔로 애호가들에게 그 진가를 인정받는 연주자들이 있는데, 음악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헌하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나 짙은 음색을 바탕으로 호소하는 매력이 일품인 요한나 마르치, 혹은 우아함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아르투르 그뤼미오 등이 이러한 타입의 연주자들이다. 한편 어떠한 곡을 연주하건 극명한 개성을 드러내는 연주자들도 있는데. ‘사고하는 지성’이라는 별칭에 걸맞은 번뜩이는 연주의 기돈 크레머,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해석처럼 느껴지게끔 연주하는 이브리 기틀리스 등이 이러한 타입의 연주자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고전음악의 세계와 재즈나 록, 혹은 블루그래스와 같은, ‘전혀 다른’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연주자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혹자는 위에 언급했던 기돈 크레머의 탱고에의 열의나 혹은 조슈아 벨의 블루그래스 음악에의 열정 등을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관심은 비록 진지하기는 하나 영속성은 부족한 느낌이다. 하지만 오늘 지면에서 소개할 나이젤 케네디(Nigel Kennedy)와 쥘 아팝(Gilles Apap)에 관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재즈와 록에 큰 영향을 받은 케네디와 블루그래스 및 인도음악에서 깊은 영감을 얻은 아팝은 각자의 ‘다른 세계’에 깊이 투신한 연주자들이다. 이는 바꾸어 이야기한다면, 고전음악에의 ‘전통적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이들에게서 어쩔 수 없는 비난(?)과 거부의 요소를 발견할 수밖에 없겠지만, 클래식의 세계에서 훈련받은 총아들이면서도 클래식 이외의 세계 또한 진지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독특한 느낌을 준다.


(사진 : Nigel Kennedy)

 클래식 앙상블이나 오케스트라의 질적 수준에 있어 결코 타 유럽 국가들에 뒤지지 않는 영국이지만 자국의 솔리스트를 꼽으라면 언뜻 떠오르는 이름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1956년 12월 28일생의 나이젤 케네디는, 이러한 영국의 독보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바이올린의 기괴한 쇳소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피아노를 좋아했던 케네디지만 메뉴힌 영재 스쿨에서 장학금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바이올린을 선택하게 되고 이 선택은 장차 클래식계의 ‘Enfant terrible(무서운 아이)’의 서막이 된다. 케네디는 예후디 메뉴인에게서 ‘와인을 음미하는 법’을 배웠다면, 스테판 그라펠리에게서 ‘독주를 마시는 법’을 익혔다. ‘클래식 커리어를 망칠 수도 있으니 피하는 게 좋다.’는 줄리아드 스쿨의 도로시 딜레이의 조언을 뒤로 하고 16세 때 재즈 바이올린의 대가, 스테판 그라펠리의 초청으로 카네기 홀에서 함께 연주하며 듀얼 커리어의 화려한 서막을 알렸다. 1984년, 그의 나이 28세 때 엘가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EMI)으로 데뷔한 케네디는, 이 음반으로 도이치 그라모폰 올해의 협주곡 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후 널리 알려진 비발디 사계 음반뿐만 아니라 월튼, 브루흐, 멘델스존, 시벨리우스, 베토벤, 브람스, 모차르트 협주곡 등에서 저만의 고유한 해석을 남기며 클래식계의 행보를 계속하는 한편, 블루노트 재즈와 록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 추모 음반, 그리고 자작 록 앨범 등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 또한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사진 : Gilles Apap)

 메뉴힌이 일찍이 ‘진정한 21세기형 바이올리니스트이다.’라고 칭한 바 있는 쥘 아팝은, 국내에서 케네디에 비한다면 지명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나 유럽에서는 널리 알려진 연주자이다. 아팝은 1963년 5월 21일 알제리 태생으로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정통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쌓았다. 프랑스 니스와 리옹 음악원, 그리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수학한 아팝은, 1985년 메뉴힌 국제 콩쿠르 현대 음악 부문에서 1등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1996년 Sony 레이블에서 데뷔음반을 내고 이후 아파라지즈(Apapaziz)라는 자작 레이블을 통해 일련의 음반들을 발매했다. 오랜 기간 캘리포니아의 산타 바바라 오케스트라 악장을 역임했으며, 인도 기행 및 집시, 컨트리 음악가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뿌리와 블루그래스 음악에의 열정을 심화시켰다.

 바이올린 음색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케네디는 특유의 진득하면서도 압착된 소리를 들려준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스트라드를 쓸 때의 사운드가 더 맘에 들지만, 1735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La Font'으로 바꾼 이후로 케네디 특유의 사운드 -저현악기를 닮은 듯한- 는 더욱 짙어진 느낌이다. 케네디의 연주는 현악기의 순정율 느낌보다는 피아노의 평균율에 더욱 닿아있다. 때문에 케네디의 연주는 바이올린 특유의 날렵함이나 화려함이 덜한 대신,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 다소 평면적이고도 무채색의 느낌이 강하다. 아팝은 케네디와 정반대의 스타일의 음색을 들려준다. 아팝은 언제나 공기를 머금은 듯 한 말랑한 사운드로 여백의 미를 강조하고 있다. 확실히 큰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거나 진중한 스타일이 필요한 레퍼토리에서 아팝의 음색은 다소 불리한 점이 있으나 대신 소소한 디테일의 표현에는 강하다. 이탈리아 명기를 사용하는 케네디에 반해 아팝은 산타 바바라의 바이올린 제작자인 제임스 위머(James Wimmer)의 악기를 사용한다. 현대 악기임에도 불구, 마음먹은 음색을 어렵지 않게 부려내는 아팝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역시 ‘연장’의 중요성보다는 그 연장을 다루는 ‘장인’의 솜씨가 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진중한 느낌에 보다 주효한 도미넌트 세트를 사용하는 케네디에 비해 아팝은 풀 세트의 에바 피라치를 애용하고 있다는 점 역시 음색의 차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케네디의 주법은 특유의 과감하고도 시원스러운 활 쓰기로 요약할 수 있다. 때로는 악기를 부셔버릴 듯한 그의 보잉에 놀랄 때도 있지만, 오케스트라에 대항해 대곡을 연주할 때 그의 스타일은 확실히 주효한 면이 있다. 특히 따로 동력을 제공받는 듯한 그의 스피카토 테크닉은, 비록 그 소리에 있어 고전적 감수성이 덜하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솔리스트로서의 화려함을 드러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듯 보이는 고정된 오른손의 자세는, 다소 불편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대신에 적극적으로 팔 전체를 사용하는 것으로 이러한 남다른 보우그립을 극복하고 있다. 이에 비해 아팝은 보다 편안하고도 자유스러운 주법을 보여준다. 음색과 마찬가지로 보우에 대한 이해 역시 케네디와 상반된 측면이 있는데, 아팝은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오른손의 손목과 손가락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때문에 시각적으로 케네디의 연주가 남성적이고 과감한 느낌이 강한 반면 아팝의 연주는 여성적이고 유연하면서도 다소 장난스럽기까지 한 인상을 준다. 때문에 아팝의 주법은 날렵한 리코쉐나 슬러 스타카토 류의 보잉 테크닉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악기와 몸과의 접촉 혹은 밸런스에 대한 이해도 꽤나 다른 편인데 케네디와 아팝은 공히 어깨받침 없이 악기를 연주하지만, 늘 악기를 턱에 고정시키고 연주하는 케네디에 반해 아팝은 끊임없이 악기를 내려놓고 몸에서 떼고자 노력한다.

 두 연주자들의 실연 무대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들이 고전적 의미에서의 무대매너와는 얼마나 동떨어진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양복 소매를 아무렇게나 잘라버린 옷을 입고 연주하는 케네디는,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잠시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하는 타입의 연주자이다(그래도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무대는 좀 나은 편이다). 아팝은 또 어떠한가. 케네디보다 한 술 더 떠서 열대 지방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셔츠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하기 일쑤다. 케네디의 ‘돌아다님’은 차라리 양반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팝은 협연 도중에도 오케스트라 구석구석을 순회한다(!). 리사이틀 도중에 피아노 건너편으로 가서 연주하는가 하면 다리를 꼬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연주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글로만 접해서는 대부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이들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로 음악에 대한 이들의 순수한 열정과 수준 높은 연주력을 꼽고 싶다. 아무리 바쁜 스케줄에도 하루 3시간의 연습 시간을 관철하려 하는 케네디는 언제나 강도 높은 리허설로 오케스트라 관계자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아팝은 어떠한가? 성인 연주자로 데뷔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학창시절 익히지 못했던 바르톡 바이올린 협주곡 2번과 쇼스타코비치 같은 레퍼토리를 섭렵해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이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아팝의 경우, 10대 시절 더 이상 바이올린이 하고 싶지 않아서 문틈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 고의로 문을 세게 닫아 손가락을 부러뜨린 일화는 특히 유명하다. 다시는 바이올린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의사의 선고에도 불구, 바이올린에의 사랑에 다시금 눈을 뜬 아팝은 현재 착실한(혹은 그만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케네디는 협주곡형 연주자이고 아팝은 리사이틀 형이다. 케네디는 선 굵은 음색과 곡 전체를 관통하는 거시적 관점을 바탕으로 대곡의 협연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음반 상으로도 바르톡의 무반주 소나타나 엘가 협주곡 등과 같은 ‘헤비’한 사운드를 필요로 하는 곡에 적합한 느낌이다. ‘크라이슬러를 사랑하고 파가니니를 혐오하는’ 케네디는, 기실 그의 음색으로는 사라사테나 파가니니, 혹은 비에니압스키류의 얇고 화려한 피스들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반해 프렌치 스타일을 섭렵한 아팝에게는 섬세한 곡들이 어울린다. 이자이나 파가니니 혹은 라벨과 드뷔시 등에서 보여주는 그의 색채감은 개성 넘친다. 하지만 때로는 2류의 취향 혹은 스타일로 여겨지는 부분도 있고 분명 케네디에 비해 음정의 정교함이나 곡의 전체적 뼈대를 입체감 있게 드러내 주는 능력은 떨어진다. 하지만 케네디의 연주가 몸에는 좋지만 어딘가 투박한 느낌의 음식과 같다면 아팝의 연주는 갖은 향신료를 넣은, 건강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일단 입에는 즐거운 음식인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다른 세계’에 대해 언급해 볼까 한다. 케네디는 ‘바흐’에의 끝없는 동경과 존경을 가진 연주자답게 재즈나 록을 연주하는 순간에도 정교한 음정과 구조적 통찰력을 놓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보잉의 영향으로 점점 연주가 거칠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재즈면 재즈, 록이면 록에서 그 장르에 걸맞은 주법과 음악성으로 청중들을 순식간에 장악한다. 하지만 그의 재즈는 어디까지나 그라펠리 류의 자연스러운 스윙에 기초한 연주라기 보다는 자신만의 도회적이고도 시니컬함이 묻어나는 방식의 재즈를 부려놓는다. 그 옛날의 Nigel Kennedy plays Jazz 음반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의 Blue Note Session 혹은 자작의 록 앨범 Kafka나 지미 핸드릭스 추모 앨범인 Kennedy Experience 등을 통해 케네디 특유의 거침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평론가는 쥘 아팝을 일컬어 ‘뛰어난 재능을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안타까운 경우이며 케네디에 비한다면 영리함마저 덜하다.’라고 평했다지만 이는 아팝의 남다름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겉모습만 놓고 보면 흡사 히피족이나 한량을 보는 것도 같지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연주자다. 세계적인 글렌 굴드 전문가이자 필름 제작자인 브루노 몽생종(Bruno Monsaingeon)과 글렌 굴드의 현악 사중주를 연주했는가 하면, 인도 전통 악기의 연주법을 자신의 연주에 접목시키고 아일랜드 피들러인 케빈 버크(Kevin Burke), 집시 바이올리니스트 로비 라카토쉬(Roby Lakatos),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디디어 록우드(Didier Lockwood), 그리고 중국 얼후 연주자인 샤오-리 창-킹(Xiao-Li Zhang-King)과도 경계 없는 앙상블을 펼친다. 아팝에 관해서라면, 지금까지도 찬반의 의견이 분분한 그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 3악장의 카덴차를 찾아보시기를 권한다(이 공연은 메뉴인 추모 연주회였고 유튜브에서 검색이 가능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매력의 나이젤 케네디와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인 쥘 아팝은, 비록 전통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폄하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자신만의 길을 가는, 그리고 공통적으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연주자들로서 청중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음악 컬럼니스트 김광훈)



* 음악은 나이젤 케네디 연주의 바흐 2성 인벤션 중 6번 E 장조
  (첼로 : 린 하렐)